[커버스토리] 기세 좋던 '핑크 타이드'…왜 갑자기 꺾였을까

입력 2023-12-18 10:01   수정 2023-12-18 15:45


‘핑크 타이드(Pink Tide)’라고 들어봤나요? 옛 소련 영향권 아래 중부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의 민주화 바람을 여러 가지 색상에 빗대 ‘OO 혁명’으로 불렀는데, 핑크 타이드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바로 중남미 좌파 정치세력의 연쇄 집권 현상을 가리킵니다.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 정당이 아닌, 온건 좌파 정권이 유행처럼 들어선다고 해서 ‘분홍 물결’이라 부르는 것이죠.

핑크 타이드가 요즘 시들합니다. 어떻게 보면 역행하는 듯합니다. 좌파 정권이 연쇄적으로 균열되고 극우 정당들이 잇따라 집권하는, 즉 ‘파 라이트 타이드(Far Right Tide)’ 현상이 뚜렷합니다. 11월 19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극우 성향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가 승리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11월 22일에는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자유를 위한 정당’이 제 1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 외에도 많은 중남미, 유럽 국가에서 강경 우파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의 사정은 다릅니다. 중남미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하기까지 했던 좌파 정권에 대한 심판이, 유럽에서는 이민자·난민 급증에 따른 사회 혼란과 전통 가치 훼손에 대한 우려가 우파 지지로 모아졌죠. 우리나라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관심입니다. 세계 정치의 흐름이 왜 이렇게 바뀌고 있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4, 5면에서 짚어보겠습니다.
'10년 주기설' 무색한 남미 핑크 타이드 '썰물'
무능·부패·과격한 집권 좌파에 급실망 한 거죠
핑크 타이드에는 ‘10년 주기’가 있다고 합니다.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10년에 한 번씩 급등하면서 중남미 좌파 정치세력이 민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마다 중남미 좌파는 원자재 기업의 국영화 등을 통해 복지 재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자원민족주의 노선에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준 것이죠. 하지만 곧 이어지는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퍼주기’에 열중하던 나라 곳간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고환율로 경제는 파탄이 났고요. 그러면 다시 우파가 집권하는 쳇바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됐습니다.

벌써부터 균열하는 핑크 타이드

핑크 타이드가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부터입니다. 직전 남미의 외채위기, 국가 주도 경제모델의 한계, 심화하는 양극화 등이 계기가 됐죠. 1998년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한 것을 시작으로 핑크 타이드가 본격화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남미 인구의 4분의 3가량이 좌파 정권 아래에 있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국제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1차 핑크 타이드는 2015년께 막을 내립니다.

2차 핑크 타이드는 2018년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 당선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우파 정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된 데다 좌파 운동가들이 혁명가에서 포퓰리스트(대중 인기 영합 정치인), 민주주의 좌파 등 체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21년 6월 급진 좌파인 페드로 카스티요가 페루 대선에서 승리하고, 12월에는 칠레에서 학생운동가 출신의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됐죠. 이어 지난해 7월 좌파 무장단체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콜롬비아의 첫 좌파 정부를 수립하고, 10월에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재집권했습다.

하지만 2차 핑크 타이드는 오래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좌파도 똑같이 부패하고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란 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좌파 정부 아래 물가상승률이 100%를 훌쩍 넘으며 “오늘이 가장 싸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아르헨티나 극우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죠. 페루의 카스티요 대통령은 측근 부패 연루 의혹 등으로 탄핵까지 당했습니다. 칠레에서는 이전 우파 정부의 유산을 전면 부정하는 급진적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좌파 열세, 우파 강세’ 흐름 선명

들쭉날쭉하는 핑크 타이드와 달리 유럽의 극우 정치세력은 2010년대 후반부터 계속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각국의 총선 등에서 극우·우파 정당의 의석수와 지지도가 크게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들은 유럽의 인종·민족·종교 등 ‘정체성’을 강조하며 무슬림 등의 이민과 난민 수용 반대, 반유로화 등을 외칩니다. 코로나19와 물가상승 등에 지친 유럽 유권자들이 이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 ‘이탈리아의 형제들’이 주축이 된 우파 연합이 승리했습니다. 올해 4월 핀란드 총선에서는 우파 국민연합당이 승리를 거두고, 제2당으로 약진한 극우 핀란드인당 등과 새 연립정부를 구성했습니다. 또 지난 9월에는 스웨덴 우파 연합이 총선에서 중도 좌파 연합을 패퇴시켰고, 한 달 뒤 스위스 총선에서는 우파 스위스국민당이 최다 득표를 했죠. 실용주의 정치 전통이 강한 네덜란드에서는 이례적으로 11월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자유를 위한 정당’이 원내 최대 정당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남미와 유럽은 경제적 발전 단계는 다르지만 정치적 전통과 역사에서는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습니다. 이것이 핑크 타이드의 출현으로 ‘디커플링’(비동조화)되는 듯했습니다. 중남미는 진보 쪽으로, 유럽은 보수화로 각각 다른 길을 잡아나가는 모습이었죠. 그러나 최근 다시 ‘좌파 열세, 우파 강세’ 추세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환경보호, 양성평등, 소수자 보호 등 좌파가 내거는 가치들이 예전보다는 관심을 덜 끄는 듯합니다. 삶의 구체적 문제에 더 주목하는 유권자들이 늘어난 때문으로 보입니다.
NIE 포인트
1. ‘핑크 타이드’의 역사를 정리해보자.

2. ‘핑크 타이드’에 균열이 생긴 이유를 알아보자.

3. 극우 세력이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유럽 내 지지세가 강한 이유를 토론해보자.
유럽도 극우 약진, 우파 지지 물결 더욱 거세져
개도국 '경제', 선진국은 '정체성'이 화두예요
이집트 출신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거대한 인류 역사를 꿰뚫는 탁월한 연구로 주목받았습니다. 19세기를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3가지 주제어로 정리한 그는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단정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 나치 정권의 인종학살이죠. 그런 파국적 양상이 자본주의 황금기(Golden Age)와 사회주의 몰락을 지나며 역사는 가치체계의 진공상태를 겪게 됩니다. 그 틈을 최근 트럼프주의 같은 극우 포퓰리즘(대중 인기 영합)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정체성’ 부각시키는 정치는 현실

21세기 극단주의를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입니다. 이는 인종·종교·민족·젠더(성) 등 유권자들의 정체성을 자극해 정치적 지지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정체성>(한국에서는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라는 제목으로 발간)이란 책에서 이런 흐름을 짚었습니다. 넓게 보면 중국 시진핑의 패권 구상인 ‘중국몽’도 중국식으로 가공된 정체성 정치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미국과의 패권 갈등을 불렀고 중국에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지만, 중국 내 국론을 모아내는 위력 또한 지녔습니다.

좌든 우든 정체성 정치에 집중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유럽 극우 강경파의 정체성 정치가 논란입니다. 이는 분리·국수주의를 조장하고 여러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외부 이민자 등에게 돌려 갈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죠. 그래서 선거 승리의 관건이 ‘경제’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지적도 많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이자 포퓰리즘 연구자인 피파 노리스는 지난 5월 튀르키예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포퓰리즘 성향이 짙은 정당이 주류인 국가의 선거에서 경제 상황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1960~1970년대 이후로 물질에 비해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유권자들이 이미 양극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념의 양극화를 꺼려온 독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은 지난 9월 지지율 조사에서 집권당인 사회민주당보다 앞서는 21%를 기록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vs. 편안히 살고픈 욕구

중남미 핑크 타이드의 퇴조와 유럽 정체성 정치를 보면 개발도상국 유권자들은 ‘경제’에, 선진국은 ‘정체성’에 더 염두를 두는 것 같습니다.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정체성은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넘어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에서 자존감을 훼손당하지 않고 전통적 가치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구’라 볼 수 있습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약간의 경제적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체성을 더 중시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세상을 각각의 정치세력이 이뤄낼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핑크 타이드는 중남미 사회주의 정파도 반대만 하는 그룹이 아니라 집권을 해서 나라를 이끌 대안 세력이라고 유권자들이 평가해준 결과입니다. 선거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언제든 유권자들이 투표로 심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핑크 타이드를 통해 좌파도 우파와 다르지 않게 부패, 무능할 수 있다는 점을 유권자들이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강대강으로 대치 중입니다. 거대 야당은 여당과의 협상보다는 ‘입법 독주’를 통해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방송3법, 양곡관리법 개정안 등을 일방 처리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런 개악법에 벌써 세 번째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대치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정치세력이 얼마나 유능하게, 부패 없이 국민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느냐를 봐야 합니다. 한국의 성숙한 유권자 의식이 총선 과정에서 어떻게 발휘될지 주목됩니다.
NIE 포인트
1. ‘정체성’이 21세기에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2. ‘먹고사는 문제’와 ‘편안히 사는 문제’ 중 무엇이 중요한지 토론해보자.

3. 한국의 정치가 세계적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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